추석 특집, 나는 누구인가

추석이면 되돌아오는 질문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오래된 물음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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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특집, 나는 누구인가

안녕하세요, 포니입니다.

추석입니다. 여러분은 명절을 좋아하시나요? ​저는 언젠가부터 명절에는 집을 지키는 홈 프로텍터가 되길 선호합니다. 명절이 되면 어른들은 으레 나의 소속처 및 근황에 관해 질문합니다. 할 말이 없어서인지,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인지는 아직 그 나이가 되지 않아 모르겠습니다. 그들에게 "네, 저는 현재 직업은 없고 월세를 겨우 내며 하루살이처럼 살아가는 3N세 포니입니다."라고 한다면 돌아올 표정과 대답이 궁금해집니다. 사실 이런 질문은 알 만한 회사의 적당한 포지션을 가지고 있다면 간편하게 넘어가기 수월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불편을 느끼는 이유는 자명하겠죠. 알 만한 회사의 특정한 포지션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를 설명하기에 너무 많은 단어가 필요하기 때문이며, 실은 저도 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그들의 질문은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습니다. 안정적으로 살고 있는지, 나이에 맞게 결혼이나 연애는 하고 있는지는 그들에게는 진심으로 중요한 안부였을 겁니다. 문제는 제가 그 질문에 그들이 원하는 답을 해줄 수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소속이 불분명하고, 결혼 계획은 없으니까요. 적당히 둘러대고 넘어가면 그만인 것을, 저는 매번 그 질문 앞에서 불효녀가 된 것 같은 기분에, 뭔가 잘못 살고 있는 것 같은 감각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피하고 싶었던 심연의 질문 앞에 다시 서게 됩니다.

나는 대체 누구일까요. 죽기 전까지 끝나지 않을 질문입니다. 우리는 이력서를 쓸 때, 면접을 준비할 때, 소개팅을 할 때 본의 아니게 인생을 돌아보게 됩니다. 저는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 아직도 어렵습니다. 지난 7월, 출간 기념회를 준비하며 문득 이런 걱정이 들더군요. 새로운 사람에게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하는가? 이런 물음을 멘토님에게 토로했고, 그 분을 통해 히라노 게이치로의 『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란 무엇인가』에서 '분인'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분인은 모두 '진정한 나'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고, 유일무이한 '진정한 나'라는 환상에 사로잡힌 까닭에 숱한 고통과 압력을 감내해왔다. 어디에도 실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고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는 끊임없는 부추김에 시달려왔다. 그것이 바로 '나'란 무엇인가라는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한 명의 인간은 '나눌 수 없는individual' 존재가 아니라 복수로 '나눌 수 있는dividual'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단 하나의 '진정한 나', 수미일관된 '흔들리지 않는' 본래의 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심연으로 매번 끌려 들어가는 것도, 오래전 들었던 이 말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포니, 너는 참 대쪽같다."라는 말을 고등학교 때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은 상당히 아리송하게 다가왔습니다. 어쩐지 융통성 없는 사람, 쉽게 굽히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진정한 나, 하나로 수렴하는 자아에 관하여 심각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나답게 행동해야 한다고 믿었죠. 어쩌면 저의 그런 믿음이 친한 친구로 하여금 '대쪽 같은 포니'로 느끼게 한 걸 지도 모르겠어요.
나다운 건 대체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답을 찾으셨나요? 집에 있으면 금세 집순이가 되는 저, 친구들과 시끌벅적 놀아 제치는 저 중 어떤 것이 저다운 모습일까요?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모습은 하나일 것이라고 규정지어야 할까요?

개인을 정수 '1'이라고 치면, 분인은 분수다. 사람마다 대인 관계 숫자가 다르므로 분모는 제각각이다. 그리고 이 점이 중요한데, 상대와의 관계에 따라 분자도 바뀐다.
사회적 분인은 우리가 일상생활의 여러 상황에서 살아가는 미분화된 상태다.

'나'라는 사람을 하나의 정수가 아닌, 여러 개의 분수의 합이라고 생각해보니 이해가 훨씬 쉬워집니다. 내 안에 여러 개의 분인이 존재함을 인정하니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마저 듭니다. 어떤 상황, 누구와 함께 있어도 늘 단일한 모습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니까요. 원래 나라는 존재가 여러 개의 분인으로 이루어진 존재임을 받아들이면 말이죠.

사람은 자기의 전부가 좋다는 말은 좀처럼 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개와 함께 있을 때의 나(분인)는 좋다는 말은 의외로 쉽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반대로 다른 아무개와 있을 때의 나는 싫다는 말도. 그래서 만약 좋아하는 분인이 하나든 둘이든 있다면,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살아가면 된다.
좋아하는 분인이 하나씩 늘어간다면, 우리는 그만큼 스스로에게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다.

이 책의 띠지에 '우리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울까'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 대목은 그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를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는 분들이라면 '분인'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해보시면 어떨까요. 저는 어떤 해방감과 동시에 실마리를 찾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 책에 나오는 '분인'의 개념은 완전히 새로운 깨달음은 아닐 것입니다. 어렴풋이 알고 있으나, 작가가 그의 언어를 통해 단어와 개념으로 정리해주니 명료해지는 감각에 가까운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추석에도 다가올 내년 설에도 이 개념을 적용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사회적 분인의 모습을 잠시 앞장서게 하면 되니까요. 그러고는 그 모습도 '나'의 일부임을, 내가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방식임을 인정하면 그만입니다.
이번 추석엔, 소속과 근황을 묻는 질문에도 그런 나로 답해볼까 합니다.